예비군 가서 멍때리다가 자유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어디 철학서에 이미 나오는 뻔한 내용일 수도 있다.
자유라는 것은 이상, 꿈, 허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완전한 자유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갖가지 맥락과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유의지와는 관점이 약간 다른데, ‘이걸 정말로 내 의지로 한 게 맞냐?’ 보다는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택지를 선택의 후보로 넣을 수 있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예를 들어, 말단 엔지니어인 욱제는 업무상 자유가 없다. 욱제가 상상하는 최고의 성과는 욱제의 능력으로는 낼 수 없다. 또한 욱제에게 그정도의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욱제는 동료 직원과 회사를 해칠 수 있는 선택에는 거리낌이 있고, 본인 또는 회사가 사망하기 전에 성과를 내야 하기에 시간의 제약이 존재하며, 욱제 본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선택은 상상의 범주에 넣지도 못할 것이다.
선택지의 정의역은 무한하지만, 개인이 선택의 후보로 둘 수 있는 선택지는 유한하다. 개인은 재능과 마음가짐과 경험에 따라 선택지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물론 그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상대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주어진 제약 속에서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자유를 가진다라고 정의했다. 가령, 입사 10년차 성민이와 입사 10일차 욱제에게 같은 업무가 주어졌을 때, 성민이는 욱제보다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욱제는 아직 코드를 찾는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은 일이 의도대로 일어나면 즐거워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린다. 개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상황도 비슷하게 정의해보자. ‘외부의 힘에 의해 개인의 선택지가 변화하는 양이 클수록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하면 어떨까? 유능감이 박탈된 정도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정의인 것 같다. 가령, ‘남들이 던진 그물의 빈틈을 메우는 일’을 한다면 개인의 선택지는 그물이 움직일 때마다 초기화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완전한 자유를 원한다. 나는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선택지가 없다면 - 자유라는 이상이 사라진다면 - 죽을 것이다. 하지만 탐구를 멈추지 않는 한, 내가 스스로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